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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사이의 줄타기 외교, 고려의 송·요·금과의 대외관계
동글나라 2025. 4. 26. 23:00목차
고려는 동아시아의 거대한 강국들인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자주성과 생존을 모색했다.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연대하며 강대국 사이에서 전략적인 줄타기를 이어간 고려의 대외정책은, 오늘날 외교 전략의 중요한 역사적 모델로 평가받는다.
1. 강대국 속 약소국? 고려 외교의 시작과 기본 원칙
고려는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된 이후부터 주변 강국과의 외교에 있어 유연하면서도 일관된 원칙을 견지하였다. 고려가 탄생한 10세기 초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요(遼)를 세우며 강력한 유목 제국으로 부상했고, 중국 본토에서는 송(宋)이 새롭게 등장하여 한족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갔다. 이후 금(金)은 여진족에 의해 세워져 또 하나의 북방 강국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고려는 세 국가와 차례로 마주하며, 민족의 자주성과 국가의 생존, 그리고 문화적 주체성을 지켜야 했다. 고려는 일관되게 자주 외교를 표방했으며, 필요에 따라 유연한 전략을 구사했다. 이는 고려가 단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외교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읽고 능동적으로 대처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왕건은 ‘불구속의 외교’를 강조하며,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다자 간 균형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가 국내 통합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외부의 군사적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한 실용적 선택이기도 했다. 특히 송나라와의 관계는 고려에게 있어 정치적·문화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 고려는 송과의 외교를 통해 중화 문명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선진 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고려 사회 전반의 제도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반면, 북방의 요나라는 송과 대립 관계에 있었으며, 고려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요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했다. 이렇듯 고려의 외교는 단순한 종속이 아닌, ‘생존과 문화의 균형’을 추구하는 정교한 전략이었다. 본문에서는 고려가 송·요·금 세 나라와 맺은 외교 관계의 전개 과정, 각 국가와의 갈등과 협력의 양상,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외교적 교훈과 현대적 시사점까지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한다.
2. 송과의 교류, 요와의 갈등, 금과의 항복 외교
고려는 초기에 송나라와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960년 송나라가 건국된 이후 고려는 적극적으로 사절을 파견하였으며, 송 역시 이를 반갑게 받아들이며 양국 간 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고려는 송을 ‘중화의 정통 왕조’로 인정하고, 예의와 격식을 중시한 외교를 통해 문명국가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고려는 송의 선진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였고, 양국 간에는 서적, 불경, 도자기, 회화, 서예 등 문화 전반에 걸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는 고려 중기 이후 유교적 질서 확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요나라와의 관계는 긴장과 충돌의 연속이었다. 특히 993년 거란이 80만 대군으로 침입한 ‘서희의 담판’은 고려 외교사의 백미로 손꼽힌다. 당시 고려는 전면전을 벌이기보다는 외교 전략을 택했다. 서희는 거란 측과의 협상에서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주장하며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얻었다. 이는 무력 충돌 없이 영토를 획득한 사례로, 고려 외교의 정점이라 평가받는다. 이후에도 거란은 두 차례 더 고려를 침공했지만, 고려는 굳건한 방어와 외교를 통해 독립을 지켜냈다. 12세기에는 금나라가 부상하면서 새로운 외교 국면이 형성되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북송을 멸망시키고 요를 압도하며 강대국으로 등장했다. 고려는 금과의 관계 설정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았는데, 금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사대를 요구한 것이다. 이에 인종은 강력한 반발을 보였지만, 여진의 군사력을 고려해 결과적으로는 금에 대한 ‘형식적 사대’를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고려의 생존 전략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존심의 상처로 남았다. 이후 고려는 금과도 정기적인 사신 교환과 교역을 이어갔고, 이를 통해 외교적으로 안정을 추구하였다. 송이 멸망하고 남송으로 이어지자, 고려는 남송과의 관계도 유지했으나, 금과의 균형을 맞추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고려는 이처럼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외교’를 통해 생존을 꾀했고, 그 중심에는 자주성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하는 외교 철학이 자리했다. 대외 갈등뿐 아니라 고려는 각국과의 문화적 교류에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보였다. 송으로부터 수입된 유교 경전과 도자기, 회화 기술 등은 고려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했으며, 반대로 고려청자와 승려 등도 송과 일본, 심지어 아라비아 지역까지 전파되었다. 이러한 문화 교류는 고려가 국제 사회 속 ‘문명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3. 고려 외교의 유산과 현대 한국 외교의 거울
고려가 송·요·금과 맺은 외교 관계는 단순히 국가 간의 협정이나 사절 파견을 넘어서, 한 국가가 복잡한 국제 환경 속에서 어떤 원칙과 전략을 세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다. 고려는 주변의 초강대국들과 마주하며, 군사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외교와 문화 교류를 통해 스스로의 위치를 조율하고, 국가의 생존과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송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고려는 문화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였고, 문치주의와 유교적 통치 질서, 학문 중심의 관료제 등 정치·사회 제도의 정비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반면 요나라와의 갈등에서는 군사적 압박 속에서도 협상으로 자주성을 지켜낸 서희의 담판이 대표적이다. 이는 국제 외교사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없는 성과’로서 평가받는다. 금나라와의 외교는 현실 정치의 냉정한 선택을 보여주는 사례다. 자주성과 자존심 사이에서의 타협은 국가의 존속을 위한 실용주의적 접근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 한국 외교도 고려의 외교로부터 많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역시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환경에 놓여 있으며, 군사적·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고려는 분명 약소국이었지만, 자신만의 외교 철학과 전략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교훈이다. 또한 고려는 외교를 단순히 정치적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문화와 예술, 종교와 학문까지 포괄하는 ‘문명 외교’를 실현하였고, 이를 통해 자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며 문화적 위상을 높였다. 고려청자, 불교문화, 유교적 학문 전통은 이러한 외교의 산물이다. 오늘날 한국이 ‘문화강국’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고려의 외교 유산은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려의 송·요·금과의 외교는 강대국 사이에서 자주성을 지키며 실리를 추구한 역사적 성공 사례다. 이는 외교의 본질이 단순한 힘의 논리가 아니라, 정체성 유지와 문화 창조, 그리고 전략적 선택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