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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일제에서 해방된 민족의 재출발
동글나라 2025. 5. 7. 13:00목차
1945년 광복은 일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역사적 전환점이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새로운 국가 건설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비극 속에서 완전한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해방 이후의 혼란과 재편 과정은 한국 현대사의 중대한 장면을 이룬다.
1. 일제 식민지 시대의 종결과 해방의 전조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마침내 35년에 걸친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광복은 순수하게 내부 독립운동의 결과라기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 패망이라는 국제적 정세의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중은 이 순간을 오랜 고통의 끝자락에서 맞이한 진정한 자유의 출발로 여겼으며,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독립운동이 이어져 왔다. 무장 투쟁으로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과 같은 한국 독립군의 활약이 있었고, 외교적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 사회에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며 활동해왔다. 문화적으로도 언론, 교육,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민족정신을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민족 말살 정책과 전시 동원 체제를 강화하며 조선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철저히 억압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로 군에 동원하고, 여자들을 **‘위안부’**로 끌고 가는 등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인권 유린을 극단적으로 자행했다. 동시에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의 자원과 노동력을 최대한 동원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인의 고통은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암울한 시기 속에서도 국내외에서는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들은 광복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해내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국제 정세의 변화 또한 한국의 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한국은 적절한 시기에 독립할 것”이라는 선언을 통해 해방 후 독립의 약속을 공식화하였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은 패전이 불가피해졌고, 소련 또한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진격하였다. 결국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한국은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방은 민족 스스로의 준비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졌으며, 내부적으로는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하였다. 외부적으로는 미·소의 군사 분할 점령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되었고, 이는 훗날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2. 해방 이후의 혼란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광복 직후 한반도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행정 권력은 사라졌고, 민중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났지만 새롭게 국가를 구성할 지도력은 부재한 상태였다. 일본은 철수하였고, 연합국은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미군(남쪽)과 소련군(북쪽)이 각각 점령하는 형태로 관리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타의에 의한 분단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미국은 38도선 이남에 미군정을 설치하고 행정권을 장악하였으며, 군정청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의 주요 사안을 통제하였다. 반면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조선공산당 중심의 인민위원회를 통해 통치를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남과 북은 이념적으로 극명히 다른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정치 세력 간의 갈등도 격화되었다. 한편, 해방 이후 국내에서는 수많은 정치 단체와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김구,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 등 각계의 지도자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과 해방의 구상 속에서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였다. 특히 임시정부 계열과 국내 사회주의 계열, 민족주의자들 간의 노선 차이는 분열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였고, 유엔은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의원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으며,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기록된다. 이후 제헌국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7월 17일 공포하였다. 이어 7월 20일,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으며, 이는 광복 이후 3년 만에 이루어진 법적·정치적 독립 국가의 출범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을 표방하며, 자유와 인권,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한 헌법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북측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립되며, 한반도는 두 개의 정부가 병존하는 분단 체제로 들어서게 된다. 이는 남북 간의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키며,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3. 광복의 의미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가치
광복은 한국 민족이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비록 외세의 힘에 의한 해방이었고, 완전한 자주 독립이라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식민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이 해방은 단순히 일제의 물리적 철수를 넘어, 새로운 국가 질서를 수립하고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회복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그러한 해방의 열망을 제도화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은 제헌 헌법을 통해 국민 주권, 삼권 분립, 기본권 보장이라는 현대적 민주주의 원칙을 명확히 천명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의 절대 군주제와 일제 식민 통치를 넘어, 국민이 주체가 되는 국가로의 진정한 출발을 상징하였다. 물론 정부 수립 과정에는 여러 한계와 비판도 존재했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은 민족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북측의 정권 수립과 함께 남북 간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제 정세와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독립과 자유를 향한 민족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후 많은 논란과 비판을 안겨주었지만, 초대 정부로서의 역사적 위치는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는 이후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라는 굵직한 역사를 지나면서 현재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왔다. 이러한 변화는 1948년 정부 수립이라는 제도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근본적인 뿌리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억압과 지배로부터 벗어난 민족이 스스로의 국가를 세우고, 주권과 민주주의, 인간 존엄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시점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해 자유와 독립이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서 있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그 책임을 되새기며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