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동학농민운동과 조선말기 사회의 저항, 민중이 만든 개혁의 서사
동글나라 2025. 5. 6. 19:00목차
동학농민운동은 조선말기 농민과 민중이 스스로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외치며 들고 일어난 최초의 대중적 저항 운동이었다. 이는 외세와 조정의 부패에 맞선 민중의 집단적 각성과 행동의 결정체로, 근대 민권 의식의 출발점이 되었다.
1. 조선 말기 민중의 삶과 동학의 등장
19세기 후반, 조선은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무능한 정치, 경제 구조의 붕괴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세도 정치와 그로 인한 부정부패, 매관매직, 삼정의 문란은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했고, 거듭된 가뭄과 흉작, 지주들의 수탈은 민중을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조세 제도는 백성에게 불공정하게 적용되었으며, 지방관과 아전들의 횡포는 일상적으로 백성의 삶을 억압하고 있었다. 여기에 외세의 영향력 확장은 조선의 주권을 위협하는 현실로 다가왔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은 조선의 경제 주권을 점점 갉아먹었고, 외국 상인의 자유로운 활동은 전통 시장 질서를 붕괴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민중의 불만을 극도로 고조시키며 새로운 사상의 등장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동학(東學)**이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민중 종교이자 사상운동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 존엄성과 평등, 도덕적 개혁을 강조하였다. 동학은 초기에는 종교적 형태로 퍼졌지만, 점차 민중의 의식을 깨우고 사회 변화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동학은 당시 기성 종교였던 유교, 불교, 천주교와 달리 하층민에게 희망을 주는 평등주의적 교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농민층 사이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동학은 조직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더욱 실천적인 사회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동학은 단순한 신앙의 틀을 넘어서 민중 스스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었고, 그 결과로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인 민중 봉기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 운동은 단순히 한 지역의 반란이 아니라, 조선 후기 민중이 최초로 주도한 체제 개혁의 시도였으며, 외세의 침탈과 조정의 무능에 동시에 맞선 조직적 저항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민중의 의식 변화와 집단적 행동이 조선 근대 정치사에 어떤 전환점을 마련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2.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민중 저항의 본질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1월, 고부 지역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세금 착취와 부패한 행정에 분노한 농민들이 전봉준의 지도 아래 봉기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들은 부패한 지방관의 교체와 조세 제도의 개혁, 동학 신도에 대한 박해 중지를 요구하며 관청을 습격하고 관아를 점거하였다. 이후 봉기는 전라도 지역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곧 제1차 봉기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전봉준은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부과되는 각종 세금을 폐지하고, 지방 관청의 부정을 단죄하며,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구호로 내세워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개혁적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남접과 북접으로 나뉘었던 동학 내부를 통합하고, 농민군을 체계적인 조직으로 구성하여 전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조정과의 협상을 통해 전주화약을 체결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집강소라는 자치 행정 조직을 인정하게 된다. 집강소는 농민 스스로 지역 질서를 유지하고,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이는 조선 역사상 민중이 직접 자치 권력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이처럼 동학농민운동은 단지 폭력적 반란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정 개혁과 자치 실현이라는 면에서 명백한 정치 혁명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세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경계하였고, 마침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청군이 조선에 입성하게 되었고, 이를 구실 삼아 일본군도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 청과 일본의 조선 진출은 곧 **청일전쟁(1894-1895)**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은 두 제국 사이의 전쟁터로 전락하고 만다. 농민군은 이 와중에 다시금 반봉기(제2차 봉기)를 단행하였으나, 일본군의 무력 앞에 패배하고 전봉준은 체포되어 처형당하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단지 무력적 실패가 아니라 조선 사회의 구조 개혁 요구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절실했는지를 보여주는 민중의 정치적 행동이었다. 이 운동은 기존 지배 질서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자, 농민이 국가 체제에 대해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중요한 순간이었다.
3.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현대적 교훈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 가장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민중 저항 운동이었다. 이는 단순한 폭동이나 반란이 아니라, 조선 민중이 체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스스로 개혁하고자 했던 최초의 집단 행동이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외세와 부패 권력에 맞서 싸우며, 조선의 근대화를 아래로부터 실현하려는 시도를 감행하였다. 이 운동이 지닌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민중의 정치적 주체화에 있다. 이전까지 조선의 정치 변화는 왕권과 양반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동학농민운동은 백성들이 단순한 피통치자가 아니라,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되어 국가 질서를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백성 개개인의 존엄과 권리를 부각시켰고, 이는 후일 민주주의와 민권 의식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이 운동은 자치와 개혁의 구체적 실현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 설치를 통해 농민들은 실제로 행정과 치안 운영을 경험하였으며, 이는 단순히 반정부 시위를 넘어 구체적인 제도 대안을 실천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민중 자치의 전범이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외세의 개입과 정부의 배신, 그리고 농민 스스로의 정치적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무력 개입은 조선 민중의 자주적 개혁 의지를 짓밟았고, 조선 정부 역시 백성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외세에 의존하는 길을 택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더욱 깊은 정치적 혼란과 외세 의존의 악순환에 빠져들게 된다. 오늘날 동학농민운동은 단지 과거의 실패한 민란으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민중이 정치와 사회를 바꾸려 했던 최초의 시도였으며,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는 사건이었다. 전봉준과 동학 농민들의 외침은 ‘개혁은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준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이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민중이 보여준 가장 강렬한 목소리였다. 비록 그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그 정신은 이후 의병 운동, 3.1운동, 독립운동,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며 한국 사회의 정의와 자주,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