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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과 조선 후기 사회 개혁의 절박한 외침
동글나라 2025. 5. 9. 09:00목차
1894년 발생한 동학 농민 운동은 조선 후기 최대의 민중 운동이자, 단순한 반봉건적 항쟁을 넘어 근대 사회로의 전환을 촉구한 사회 개혁 운동이었다. 동학이라는 사상적 기반 위에서 전개된 이 운동은 탐관오리 척결, 신분 철폐, 토지 개혁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개혁 요구를 담고 있었으며, 이후 조선 정치사와 근대화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절망 속에서 피어난 민중의 희망, 동학 농민 운동의 역사적 전개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후반은 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의 시대였다. 내부적으로는 세도 정치의 장기화, 관료 부패, 불공정한 조세 제도, 농민 경제의 붕괴 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에 가까웠다. 외적으로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경제적, 군사적 압박이 강화되면서 조선은 자주권의 위협을 받기 시작했고, 이는 민심의 동요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다. 이 운동은 단순한 지역 봉기가 아니라,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며 조선 후기 최대의 농민 항쟁이자 사상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운동의 배경에는 새로운 종교이자 사상인 ‘동학’이 있었으며, 이는 최제우가 창시한 민중 중심의 종교로, 인간 존엄과 평등, 자주성을 강조한 사상이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간 중심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신분 차별과 봉건적 억압을 거부하였다. 이는 지배층 중심의 유교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상이었으며, 민중의 삶과 직결된 현실적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피폐한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최시형과 손병희에 의해 동학은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었으며,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악정에 대한 반발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고부 봉기가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된다. 1차 봉기에서 전봉준은 탐관오리의 부패를 지적하며 ‘폐정 개혁안 12조’를 제시하였고, 이 안은 동학 농민 운동의 핵심 정신이자 사회 개혁의 실질적 요구였다. 이후 이 운동은 ‘백성에 의한 개혁’을 상징하는 대표적 민중운동으로 자리 잡게 되며, 단지 저항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제안으로 확대된다. 동학 농민 운동은 이처럼 시대적 절망 속에서 민중 스스로가 삶의 주체로 나서고자 했던 역사적 몸부림이었으며, 이는 조선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인 출발점이 된다.
2. 폐정 개혁과 자주적 정치 체계에 대한 요구
동학 농민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한 항쟁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개혁안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자 했다는 점이다. 1차 봉기 이후 전봉준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면서 ‘전주 화약’을 통해 조정과 일시적 타협을 이루게 되는데, 이 시기 발표된 ‘폐정 개혁안 12조’는 민중이 요구한 실질적 사회 개혁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폐정 개혁안 12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중한 세금의 철폐, 부패한 관리 처벌, 백성의 신분 해방, 토지의 공정한 분배, 여성의 인권 보호, 향회 및 자치 기구의 정비 등이다. 이는 민중의 삶을 직접적으로 바꾸기 위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개혁안이었으며, 당시 조선 정부가 전혀 감당하지 못한 ‘근대적 국가’로의 전환을 요구한 것이었다. 동학 농민군은 단순히 정부를 전복하거나 정권을 장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조선 사회를 새롭게 정비하고 백성 중심의 자주적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전주성을 점령한 뒤 이들은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자체적으로 운영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 최초의 민중 자치 실험을 실현하였다. 이는 중앙 정부의 기능이 마비된 상황 속에서, 민중 스스로 행정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전례 없는 시도였다. 그러나 2차 봉기는 외세 개입이라는 변수로 인해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된다.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 이를 구실로 일본이 개입하게 되었고, 결국 ‘갑오농민전쟁’으로 비화된다.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과의 충돌 속에서 전주성 탈환을 시도하였고, 각지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무장력과 조직력의 한계로 인해 결국 패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군이 학살되었고, 전봉준 또한 체포되어 사형당한다.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단지 소멸되지 않았으며, 이후 의병운동과 개화운동, 민족운동의 정신적 기반으로 이어지게 된다.
3. 조선의 변화를 촉구한 민중 개혁의 외침
동학 농민 운동은 조선 후기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민중 스스로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가장 적극적인 시도였다. 왕과 관료, 양반 중심의 조선 체제가 더 이상 백성의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현실 속에서, 농민들은 직접 나서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실행하고자 하였다. 이는 단지 한 시대의 반란이나 민란으로 축소할 수 없는, 조선 사회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분출된 사회 개혁 운동이었다. 폐정 개혁안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구체적인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었으며, 이는 근대 사회의 초입에 서 있던 조선 백성들이 결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신분제를 거부하고, 백성 개개인이 나라의 주인임을 외쳤다. 이는 민중 주권 사상의 시작점이며, 이후 헌정 정치와 민주주의 이념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이 남긴 정신은 조선의 몰락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계승된다.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3·1운동,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에는 늘 민중의 자각과 자주적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바로 그 첫 불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운동을 단지 민란이 아닌 ‘시민 혁명’의 초기 형태로 평가할 수 있으며, 이는 한국 민주주의와 민권 의식의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동학 농민 운동은 단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그들의 외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공동체의 정의, 자치, 평등을 위한 핵심 원칙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