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부마민주항쟁과 10.26 사건, 유신의 종말을 이끈 민중과 총성
동글나라 2025. 4. 29. 19:00목차
1979년, 유신체제의 말기. 부산과 마산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그 불길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급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했다. 이 글에서는 부마민주항쟁과 10.26 사건의 전개 과정, 그 상징성과 정치적 결과를 분석하고, 한국 민주주의의 결정적 분기점을 조명한다.
1. 억눌린 민심의 폭발, 거리로 쏟아진 민주주의의 열망
1979년 가을, 대한민국 남부의 도시 부산과 마산은 평소와는 다른 격동의 풍경을 맞이했습니다. 유신체제 하에서 쌓이고 쌓인 민중의 분노가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서며 거리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동안 긴급조치와 언론 통제, 정치 탄압으로 짓눌려 있던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그 외침은 유신의 심장부까지 흔들었습니다. 바로 **부마민주항쟁**이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은 단순한 지역적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7년간 지속된 독재 정치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며, 특히 지역 노동자와 서민층이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사회 전체의 민주화 열망을 반영한 운동이었습니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집회에서 시작된 이 항쟁은 곧 시민들로 확산되었고, 이후 마산으로 번져 유신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이미 국민의 저항은 단순한 불만을 넘어선 혁명적 분위기에 가까웠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유신 반대의 기류는 빠르게 확산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재야 인사와 종교계, 언론계에서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정권 내부에서조차 위기의식을 느낀 한 인물—김재규 중앙정보부장—는 충격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유신 독재의 상징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부마민주항쟁의 전개와 참여 주체, 사회적 의미를 짚고, 10.26 사건이라는 극적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전개를 살펴보며,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분수령이 된 이 사건들의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해보겠습니다.
2. 거리의 항쟁과 권력 내부의 균열, 유신체제의 붕괴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200여 명이 교내에서 박정희 정권 퇴진과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 부마민주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시위는 곧 부산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18일에는 시민 약 5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로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긴급조치 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충돌했고, 시내 중심가는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경찰의 강경 진압에도 시위는 멈추지 않았고, 10월 19일에는 마산으로 불길이 번졌습니다. 마산에서는 창신고등학교와 마산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고, 상점과 일반 시민들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는 정부기관, 방송국, 시청 등을 향해 행진하며 분노를 표출했고, 도시 전체가 일시적으로 ‘민중의 해방 공간’처럼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전국적 항쟁에 박정희 정권은 위기감을 느끼고, 계엄령 선포와 함께 군 투입을 결정합니다. 실탄이 발포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폭력적 진압이 이루어졌고, 약 1,500명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하거나 구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심은 이미 유신 정권을 외면하고 있었고, 정권 내부에서도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더 이상 박정희의 통치가 지속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김재규는 오랜 기간 박정희의 측근이었지만, 유신체제의 지속성과 부마항쟁의 진압 방식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특히 박정희가 항쟁 진압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용하려는 움직임에 반발했습니다. 결국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서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총격을 가했고, 그 자리에서 두 사람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정권의 중심부에서 발생한 내적 붕괴였으며, 유신 독재가 내부 모순에 의해 끝나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10.26 사건 이후,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계엄령 하에서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하는 과도 정부가 출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이어 12.12 군사 반란이 발생하며 또 다른 군부 집권, 즉 신군부 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3. 거리의 외침과 총성의 결말, 민주주의를 향한 또 하나의 비극
부마민주항쟁과 10.26 사건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는 거리의 시민들이, 다른 하나는 권력의 최심부가 유신체제의 종말을 선언한 것입니다. 부마항쟁은 단지 지역적 저항이 아니라,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의 상징이 되었고, 10.26 사건은 절대 권력도 내부 균열과 국민의 분노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은 특히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가 두드러졌습니다. 대학생뿐 아니라 고등학생, 상인, 노동자, 종교계 인사까지 함께한 항쟁은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시민 저항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부산과 마산은 이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 도시’로 자리 잡았고, 이후 이 사건은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며 그 정신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10.26 사건은 독재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극적인 전환을 통해 체제를 종식시켰지만,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곧이어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또 다른 권위주의의 시대로 우리를 인도했으며, 민주주의는 여전히 먼 길을 돌아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부마항쟁과 10.26을 단지 한 권력의 끝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국민이 주권을 되찾고자 한 뜨거운 의지였고, 권력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때 어떤 결말을 맞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거울입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부마항쟁은 무엇인가?” 그리고 다짐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거리에서 시작되고, 권력은 늘 국민 앞에 책임져야 한다.” 부마항쟁과 10.26의 교훈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