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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와 하얼빈 의거: 동양 평화를 향한 총성
동글나라 2025. 5. 9. 21:00목차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며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결연한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이 의거는 단순한 복수가 아닌 민족과 인류의 정의를 향한 실천이었으며,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단지 조선만이 아닌, 동양 전체를 위한 결단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을 쏜 이는 조선의 청년 안중근(安重根) 의사였고, 그의 표적은 조선 병탄의 주역이자 동양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이 사건은 조선의 독립운동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근현대사에서 상징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안중근은 단순히 이토 개인에 대한 원한으로 총을 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의 조선 강점 및 침략 정책의 상징으로 인식하였고, 그를 처단함으로써 조선의 독립 의지와 동양의 평화를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가 하얼빈 의거 직후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며 밝힌 진술에는 "조선 침략뿐만 아니라 동양의 공존을 해친 범죄자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분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당시 안중근은 국외 독립운동 조직인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실력 저항을 결의하였다. 그는 대한 독립이라는 당면 목표를 넘어서,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 국가와의 협력 속에서 ‘동양 평화’를 구현하고자 했다. 즉, 그의 의거는 민족적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반영된 결단이었다. 하얼빈 의거는 비록 일본과 열강에 의해 ‘테러행위’로 규정되었지만, 세계 각국 언론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안중근의 이상과 철학, 그리고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 이는 조선인이 단지 희생자나 복수자가 아닌, 시대의 도덕과 정의를 실천한 주체임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특히 하얼빈이라는 국제도시에서 공개적으로, 외국 언론과 외교관 앞에서 의거가 실행되었다는 점은 국제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안중근은 단순한 독립운동가를 넘어서, 당대 세계가 외면한 약소국의 절박한 외침을 정의롭게 구현한 인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2. 재판정에서 더 빛난 ‘사상가’ 안중근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은 러시아 경찰에 의해 체포된 후 일본 측에 인도되어 뤼순(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축소하려 하였지만, 안중근은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민족과 인류를 위한 정의로운 저항으로 정당화하였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동양 침략의 수괴'로 규정하며, 그에 대한 사형은 조선을 비롯한 동양 민중의 권리와 생명을 위한 정당한 응징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재판 중 15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제출하며, 정치적 논리와 윤리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행동을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이 문서는 이후 독립운동 사료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안중근은 재판정에서도 의연했고,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도 일본 법관들을 향해 논리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자신이 결코 범죄자가 아닌, 약소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투사임을 줄곧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행위가 단순한 개인의 의지나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조직적 합의와 철저한 준비 아래 진행된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음을 밝힘으로써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수감 중 그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이 저술에서 그는 조선, 중국, 일본이 상호 협력할 때만이 진정한 동양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역설하였으며, 군사력과 침략이 아닌 문화와 교육, 경제 협력을 통해 동아시아가 공동 번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단순한 민족주의를 넘어, 인류 공동체로서의 미래를 제시한 것이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일본 당국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 수많은 이들의 상징적 ‘부활’이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나라를 위해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이후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로 남게 된다.
3. 안중근 정신의 계승과 하얼빈 의거의 현재적 의미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단순한 항일 투쟁이 아닌, ‘의(義)’와 ‘인(仁)’, 그리고 ‘정의(正義)’를 실천한 철학적 행위였다. 그는 한 국가의 독립만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공존과 인류의 보편적 정의를 위해 총을 들었다. 하얼빈에서 울린 총성은 곧 약소국의 외침이자, 불의한 세력에 맞서는 세계시민의 선언이었다. 그의 삶은 짧았지만, 남긴 영향은 거대했다.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안중근을 본받았고, 그의 사진과 말은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아직도 평화와 정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철학적 사유의 기초를 제공하며, 그의 생애는 정의로운 행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대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안중근을 단지 ‘이토를 죽인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 아니라, 침략에 맞서 평화와 정의를 외친 철학자이자 실천가로 기억해야 한다. 그의 의거는 국제법과 외교가 약소국을 외면할 때, 약자의 정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실례이다. 하얼빈 의거는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외침이었고, 동시에 독립운동의 도화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정의를 외치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삶의 자세이자, 역사의 나침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