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을미사변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국권 침탈의 서막과 제국주의의 폭력
동글나라 2025. 5. 6. 23:00목차
을미사변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노골적으로 간섭하며 명성황후를 시해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는 조선의 주권 상실과 국권 침탈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조선 내부 개혁과 자주권 회복을 저지하려는 제국주의의 폭력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다.
1. 근대 개혁기의 혼란과 명성황후의 정치적 부상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후반은 국내외적 격동이 한반도를 흔든 시기였다.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무너진 국정과 극심한 사회 혼란, 그리고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적 접근이 조선을 외교적, 군사적으로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 가운데 명성황후는 단순한 왕비를 넘어 조선 정치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명성황후 민씨는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의 비로, 남편인 고종이 비교적 유약한 성격을 지닌 군주였던 탓에 왕실의 정치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그녀는 외척의 권력 장악을 우려하며 친정 세력보다는 왕실 중심의 중앙집권 강화를 추구했고, 특히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며 청나라 및 러시아와의 연계를 통해 균형 외교를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명성황후의 행보를 극히 불편하게 여겼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하려 하였고,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을 근대 국가로 포장한 뒤, 사실상 일본의 종속국으로 만들려 했다. 명성황후는 이에 대항하여 일본에 맞서 러시아와의 접촉을 강화하며 자주 외교를 펼쳤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정치의 방해자'로 규정하고, 그녀를 제거함으로써 조선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 즉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암살을 넘어, 외세가 주권국의 왕비를 타국 군대와 낭인(浪人)을 동원해 살해한 전무후무한 정치 테러이자, 조선 주권 침탈의 결정적 계기였다. 을미사변은 단지 한 인물의 죽음이 아니라, 조선이 더 이상 독립국으로서의 위신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 독립을 향한 노력이 외세의 강압 앞에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은 이후 대한제국의 수립과 식민지화로 이어지는 근대사의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2. 을미사변의 전개와 일본의 조선 지배 전략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관의 사주를 받은 일본군과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암살한 사건이다.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탈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었으며, 조선을 사실상 보호국화하려는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와의 접촉을 확대하며 일본의 간섭을 견제하고 있었고, 이는 일본으로 하여금 그녀의 존재를 심각한 장애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암살 작전은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일본군 장교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한 계획 하에, 경복궁에 침입한 자들은 궁내의 저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명성황후를 찾기 위해 강제로 궁 안을 수색하였다. 그들은 명성황후를 발견한 후 곧바로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뒤, 불태우기까지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경위군은 무장 해제를 당한 상태였으며, 궁 안의 내관들과 궁녀들은 폭력에 속수무책이었다. 을미사변은 명백한 일본의 내정 간섭이자 주권 침해였으며, 국제 사회에서도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이를 적극적으로 규탄할 힘도, 국제적으로 고발할 외교력도 부족했다. 고종은 사건 직후 정신적 충격에 빠졌으며, 이후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 을 단행하게 된다. 이는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일본에 대해 극도의 불신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의 보호를 받기 위해 거처를 옮긴 사건이다. 을미사변 이후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은 고종과 왕실의 약화된 권위를 틈타 조선을 보다 체계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제도 개혁과 군사 통제를 강화하였다. 명성황후가 추진했던 자주 외교와 중립 외교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조선은 일본의 외교적 조정 아래 움직이는 반식민 상태로 전락하였다. 또한 을미사변은 조선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을미의병의 거국적 봉기를 촉발하게 된다. 농민과 유생, 일부 양반까지도 가세한 이 항쟁은 조선 민중이 일본의 야만적 침략 행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이후 의병 운동으로 이어져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의 항일 운동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3. 을미사변의 역사적 의미와 조선 근대사의 전환점
을미사변은 조선이 외세의 내정 간섭을 받는 수준을 넘어, 국왕의 정실이 외국 군대에 의해 궁궐 안에서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암살을 넘어, 조선이라는 주권 국가의 실질적 몰락과 외세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이정표였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조선 정치의 한 중심축이 붕괴되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조선 왕조 자체의 위신과 독립성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명성황후는 조선 후기 복잡한 외교 정세 속에서 외세 간의 균형 외교를 추구하며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려 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일본의 일방적 개입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이 결국 일본의 폭력적 반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정치적 행보는 외세 의존적이었으나, 조선의 자주 외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일본과 거리를 두려 했지만, 조선의 운명은 이미 일본에 크게 기울어 있었다. 이후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황제 중심의 정치 개편이 이루어졌으나, 이는 일본의 침략적 외교 전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명성황후의 부재는 정치적 공백을 초래했으며, 조선은 점차 일본의 경제적·군사적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을미사변은 조선 민중에게도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는 곧바로 을미의병의 봉기로 이어졌다. 유생, 향촌 지식인, 농민이 중심이 된 이 항쟁은 조선 후기 민중 항일 의식의 중요한 시발점으로 작용했으며, 이후 항일 의병 운동의 흐름으로 발전하게 된다. 명성황후의 시해는 단순한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닌, 조선의 역사적 정체성과 민족 자존심에 대한 공격이었기에 그 여파는 단기간에 그치지 않았다. 결국 을미사변은 조선이 근대화의 갈림길에서 외세에 의해 좌절되는 과정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다. 이는 조선이 스스로의 자주 개혁을 이루지 못했을 때 외세에 의해 얼마나 무기력하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사례이며, 이후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과 민주주의를 통해 스스로를 다시 세워나가는 긴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조선 근대사의 비극이자, 민족 자주권 회복의 불씨를 남긴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