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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병과 국권 수호의 마지막 보루
동글나라 2025. 5. 9. 13:00목차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하여 전개된 을사의병은 조선 말기 국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무장 저항이었다. 외교권을 강탈당한 현실 앞에서 민중과 유생들은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고, 이들의 저항은 이후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족 의식의 불꽃이 되었다. 본문에서는 을사의병의 전개와 역사적 의미를 다룬다.
1. 외교권을 빼앗긴 조선, 민중의 마지막 저항이 시작되다
1905년 11월, 일본은 무력을 배경으로 고종 황제를 협박하고 내각을 압박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 정부의 동의 없이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며, 조선이 자주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상실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을사늑약의 체결 소식은 전국에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곧바로 자발적인 무장 저항이 일어났다. 이 무장 투쟁이 바로 '을사의병'이다. 을사의병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발생한 을미의병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닌, 민중과 지식인의 자발적 항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배경에 ‘국권 수호’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동기가 있었다. 을사의병은 단지 외세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과 국가 존엄을 지키기 위한 백성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유생과 평민이 주축이 된 의병대가 조직되었고, 특히 호남·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의병장이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은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하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었다. 이들은 을사오적(조약 체결에 협력한 5명의 관료)을 단죄하고, 일본의 통감부와 일본군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였다. 고종 황제는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외국 공관에 보내며 국제적 지지를 요청했지만, 열강들은 침묵하거나 일본의 편에 섰다. 결국 조선은 외교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을사의병은 국가 권력의 뒷받침 없이 고립된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굴하지 않고 “나라가 없어도 백성은 있고, 의리는 살아 있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2. 을사의병의 전개와 무장 저항의 심화
을사의병은 대체로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첫째는 유생 중심의 상징적 항쟁이다. 이들은 일제의 조약 체결과 국권 침탈을 유교적 ‘충’과 ‘의’의 윤리로 규탄하며,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들은 자결이나 상소를 통해 조약 철회를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최익현은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의병을 이끌고 싸움터에 나섰다. 둘째는 실질적인 무장 투쟁이었다. 신돌석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지방 관아를 습격하고 일본군 수송로를 차단하며 치열한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토착 지형에 익숙함을 무기로 하여 기습과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으며, 백성의 지지를 받으며 짧은 기간 동안 지방 통치를 사실상 장악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단순한 전투 집단이 아니라, 지역 사회를 방어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조직이었다. 셋째는 망명을 통한 국외 항쟁이다. 의병 중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초기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들은 ‘의병 정신’을 국외로 이어가며, 해외에서 무장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확산시켰다. 을사의병은 결국 일본군의 무력 진압과 조선 정부의 비협조, 내부의 조직 미비 등으로 인해 1907년을 기점으로 점차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살아남아 이후 정미의병, 의열단, 광복군 등으로 이어지며 무장 독립운동의 맥을 형성하였다.
3. 국권 수호의 상징, 을사의병의 역사적 유산
을사의병은 조선의 국권이 강탈당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백성들이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선 민족 저항의 정수였다. 비록 국가가 무력했고, 국제사회는 침묵했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은 외세와의 불평등 조약에 맞서 싸웠고,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 운동은 비단 무력 항쟁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 민중이 정치의 주체로서 자각하고 행동에 나선 상징적 사건이었다.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을미의병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을사의병은 항일 운동의 정점에 위치하며 이후의 모든 독립운동의 사상적·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을사의병은 끝내 조약을 철회시키지 못했지만, 그 실패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민족 자존의 불씨로 남아, 결국 광복의 토양이 되었다. 이들이 흘린 피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기억되어야 하며,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 계승되어야 한다. ‘을사’라는 이름 속에 담긴 분노와 절망, 그리고 항전은 단지 과거가 아닌 현재의 거울이다. 국권이 흔들리고, 정의가 위협받는 순간에도 백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역사를 지켜냈다는 사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과 책임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