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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과 조선 사회의 신분 차별 철폐 운동
동글나라 2025. 5. 10. 05:00목차
1923년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은 조선 후기부터 지속되어 온 백정 차별에 맞서 평등권을 요구한 사회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단지 계층 간 평등을 요구한 것을 넘어, 조선 사회의 근대화를 촉진한 인권운동의 출발점이자, 이후 사회개혁의 기반이 되었다.
1.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외침, 진주에서 울려 퍼지다
조선 사회는 유교적 질서를 기반으로 엄격한 신분 체계를 유지해왔다. 양반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과 상민, 천민으로 이어지는 위계적 구조 속에서, 특히 ‘백정’으로 대표되는 천민 계층은 제도적·관습적으로 심각한 차별을 받아왔다. 이들은 직업적으로 도살, 가죽 제조, 잡역 등을 맡으며 사회적으로 천시받았고, 심지어 이름조차 호명되지 않고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조선의 신분제가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공공기관 채용, 교육, 결혼, 지역 공동체 참여 등에서 이들은 제약을 받았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조차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뜻있는 백정 출신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형평사(衡平社)'를 창립하며 형평운동이 시작된다. 형평운동은 백정이라는 낙인을 벗기 위한 운동이자, 조선 사회 전반에 깔린 신분 차별 구조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운동의 명칭인 ‘형평’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법과 제도 이전에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를 요구하는 실존적 외침이었다. 이들은 “우리는 사람이다”라는 강렬한 슬로건을 내세우며, 교육 평등, 직업 선택의 자유, 결혼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특히 형평사는 창립 초기부터 문서 활동, 강연, 성명서 발표, 청원서 제출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백정이라는 신분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차별 철폐를 요구한 이들의 용기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민중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형평운동은 단지 백정 계층의 인권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운동으로 확대되었으며, 조선이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평등 의식의 각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 형평운동의 확산과 저항, 그리고 제도 개혁의 씨앗
형평사는 결성 직후부터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고자 노력하였다. 진주를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은 물론, 대구, 광주, 서울, 심지어 만주 지역까지 지회를 두며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주요 활동으로는 ‘형평사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며 차별 사례를 고발하고 평등권을 호소하였으며, 학교 개설을 통해 백정 자녀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직업 훈련과 자립 운동을 병행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운동은 곧 기존 지배 계층은 물론, 일반 민중 사이에서도 강한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양반 출신은 물론 일반 상민 계층조차도 ‘백정이 감히 사람 대접을 받으려 하느냐’는 식의 냉소와 혐오를 드러냈고, 형평사 회원과 가족들은 지속적인 괴롭힘과 폭력, 사회적 배제를 감내해야 했다. 일제 역시 이 운동을 정치적 불온 세력으로 간주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형평운동이 좌익 세력과 연계된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의 감시와 체포가 이어졌고, 주요 간부들이 구속되거나 고문을 당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형평사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열과 내분을 겪게 되고, 조직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형평운동은 조선 사회의 계층적 불평등을 뿌리째 흔든 상징적 사건이었다. 형평사 회원들은 스스로를 ‘평등한 인간’으로 인식하고 사회의 시선과 폭력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갔으며, 그들의 행위는 민중운동, 인권운동, 여성운동, 교육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형평운동은 또한 근대 국가의 조건인 ‘시민의 권리’ 개념을 조선 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즉, 양반-천민의 위계에서 벗어나 법 앞의 평등, 기회의 평등을 요구하는 흐름을 만들어냄으로써, 조선 사회에 처음으로 ‘보편적 인간의 권리’ 개념이 실천적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3. 오늘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형평의 외침
형평운동은 조선 사회의 깊은 차별 구조를 극복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자 한 최초의 대중적 인권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단지 특정 계층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감당해야 했던 가장 본질적인 과제를 제기하였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가장 멸시받던 자리에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먼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외쳤고, 그 누구보다 먼저 평등한 사회를 상상하였다. 형평운동은 비록 제도적으로는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 정신은 이후 다양한 형태의 사회 운동, 인권운동, 평등운동으로 계승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형식적으로는 신분제와 차별을 철폐하였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보이지 않는 신분제’가 존재하고 있다. 경제적 계급, 출신 지역, 학벌, 성별 등에 따라 차별이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형평운동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닌,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제공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형평운동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은 태어난 조건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장 근본적인 민주주의의 가치이자, 인간 존엄의 원칙을 실천한 소중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진주에서 시작된 이 외침은 조용했지만, 강력했고, 짧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겼다. 형평운동은 말한다. “사람은 사람이다.” 이 당연한 진리를 외치기 위해 싸웠던 이들의 이름 없는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