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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와 제4공화국의 붕괴, 총성과 함께 끝난 유신의 시대
동글나라 2025. 5. 8. 05:00목차
1979년 10.26 사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사건으로, 권위주의 체제인 제4공화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이 사건은 유신체제 붕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민주화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1. 유신체제의 위기와 내부 균열
1970년대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룩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갈등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을 통해 대통령 임기 제한을 철폐하고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며 사실상 종신집권을 시도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정치적 자유와 국민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침해되는 권위주의적 체제로 변모하였다. 유신헌법 하에서 박정희는 긴급조치권을 남발하며 민주주의를 억압하였다. 언론 검열, 야당 탄압, 학생 운동 탄압은 일상화되었고, 정치적 반대 의견은 국가 안보라는 이름 아래 제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유신체제는 점차 국민적 저항과 내부 균열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1978년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득표율에서 야당에 밀리며 민심 이반이 드러났다. 경제적으로도 제2차 석유 파동, 물가 상승, 노동자의 열악한 근로 환경 등으로 인해 국민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더해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의 붕괴 조짐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대학생과 시민들이 주도한 이 항쟁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유신체제 전면 거부 운동으로 확대되었고, 정부는 이를 강경 진압하며 수많은 체포와 희생자를 낳았다. 이런 가운데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도 갈등이 고조되었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간의 권력 다툼은 극에 달했고, 박정희는 점차 차지철의 말을 더 신뢰하며 김재규를 배제하기 시작하였다. 김재규는 점점 극단적인 결단을 고민하게 되었고, 마침내 1979년 10월 26일, 운명의 사건이 발생한다.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소규모 만찬 중, 김재규는 권총을 꺼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을 향해 총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유신의 핵심 인물들이 현장에서 사망하게 되고,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인 10.26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2. 10.26 사태의 전개와 정권 붕괴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비공식 만찬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는 이미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긴장감 속에서 대화가 오갔다. 당시까지도 김재규는 박정희가 자신을 다시 신뢰할 수 있을지 마지막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 자리에서도 김재규를 질책하고, 차지철은 공개적으로 그의 판단과 역할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분노한 김재규는 식사가 끝난 뒤, 별실에서 준비하고 있던 권총을 꺼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차례로 사살하였다. 당시 김재규는 박정희에 대한 정당한 정치적 심판이라며 “민주화를 위한 결단”이라는 논리를 폈지만, 그의 행동은 당시 정부는 물론 일반 국민에게도 충격 그 자체였다. 10.26 직후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비서실장 김계원은 청와대를 탈출해 상황을 군 수뇌부에 알렸고, 합참과 보안사령부는 즉시 비상 체제로 돌입하였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정변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이를 저지하고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다. 10월 27일 새벽, 박정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국가적 혼란과 충격 속에서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김재규는 곧 체포되었고, 1980년 5월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되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유신을 끝내기 위한 결단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정치적 정당성보다는 권력 암투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10.26 사태는 단순한 암살 사건을 넘어, 유신체제라는 독재 권력 구조의 붕괴를 상징하였다. 유신정권은 박정희 개인의 권위와 통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함께 체제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붕괴되었다.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은 일시적으로 군내 권력 다툼과 정치적 공백 상태를 맞이하였으며,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함께 불안감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기다려야 했다.
3. 10.26 이후의 변화와 민주화의 싹
박정희의 죽음은 한국 정치사에서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오랜 기간 유신체제로 대표되던 권위주의 정권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은 많은 국민에게 충격이자 동시에 새로운 희망의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곧 또 다른 군부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10.26 이후 대한민국은 정치적 공백 상태에 돌입하였다. 헌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지만, 그는 통합력과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국가적 위기를 수습하지 못했다. 이 틈을 노리고 군 내부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으로서 군 내부 정보와 동향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재규의 수사를 담당하며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결국 12월 12일, 그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며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은 10.26 이후의 민주화 기회를 또 한 번 좌절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대한민국은 다시 군부 통치 체제로 회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26 사태는 유신체제라는 독재 통치의 종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다. 박정희는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서 일정한 공을 인정받지만, 동시에 정치적 자유를 억압한 권위주의 통치자이기도 했다. 그의 통치는 오랜 시간 동안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다양성을 짓눌렀다. 따라서 10.26은 단지 한 정치인의 죽음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붕괴였으며, 민주주의 회복의 실마리를 제공한 사건이었다. 이후 이어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은 모두 이때 형성된 민주주의 열망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10.26은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안에는 권력의 무상함과 국민이 원하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하는 교훈이 담겨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10.26을 단순한 암살 사건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강한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한 결과가 어떤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며, 헌법과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 통치는 결국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일깨운다. 민주주의는 총성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로 유지되고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리를 정치가, 사회가, 제도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현하는가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는 다시 그려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