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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인 사건과 일제의 탄압: 독립운동을 꺾으려던 조작과 그 저항의 불꽃
동글나라 2025. 5. 4. 19:00목차
1911년, 일제는 평양 지역에서 활동하던 신민회의 주요 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하고 대규모 체포와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105인 사건의 발생 배경, 전개 과정, 일본의 식민 통치 전략, 피해자의 고초와 항일 의식, 사건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교훈을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1. 독립운동을 뿌리 뽑기 위한 정치적 조작: 105인 사건의 배경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국권을 일본에 완전히 빼앗기고 ‘한일병합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에 의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주권을 상실하고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민족의 절망과 저항이 동시에 분출되는 시기를 맞이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조선 내 민족운동의 뿌리를 조기에 제거하기 위해 철저한 감시와 탄압 체계를 강화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의 눈에 거슬린 조직은 1907년부터 활동을 전개하던 신민회였습니다. 신민회는 이미 교육·출판·경제·무장 준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민중 속으로 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일제는 이러한 신민회의 영향력을 정식 병합 초기에 반드시 제거해야 할 목표로 설정하였고, 이에 따라 1911년 9월경부터 대대적인 사찰과 내사, 조작을 통한 ‘공안 사건’ 연출에 착수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105인 사건(一〇五人事件)’, 또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조작극이었습니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 조선 민족운동의 핵심 인물들을 모두 제거하고, 독립의 씨앗 자체를 뿌리 뽑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으며, 그 결과 조선 사회는 **암흑의 침묵기, 이른바 '무단 통치의 시작점'**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2. 105인 사건의 전개와 일제의 탄압 방식
● **사건 조작의 개요** 1910년대 초, 일제는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민회의 주요 인물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날조합니다. 이를 명분으로 평양, 서울, 대구 등지에서 **지식인, 종교인, 교육자, 청년, 학생 등 무려 700여 명을 체포**했고, 그 중 105명을 선별하여 ‘공범자’로 규정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신민회 활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사들이었으며,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이승훈, 윤치호 등 독립운동의 핵심 리더들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 강압적 수사와 고문, 재판 피체된 인물들은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고,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장기간의 감금과 신문이 이어졌습니다. 1912년 9월, 일제는 이들을 일본 법정에 회부하여 재판을 진행했으며, 105인 중 47명에게 유죄 판결, 일부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제 사회와 기독교계, 언론 등의 비판으로 인해, 이후 대부분의 형량은 감형되거나 석방되었지만, 이 사건은 신민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조선 사회 전반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 조선총독부의 탄압 전략 일제는 105인 사건을 통해 조선 민족운동 전체를 '폭력·음모·반란'의 이미지로 매도하고,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동시에 교육기관(대성학교·오산학교 등)을 폐쇄하고, 기독교와 민족교육의 연결 고리를 차단하는 등 조직적 검열과 해체를 병행하였습니다. 언론에 의한 반응도 차단하고, 보도 금지 조치와 검열 강화를 통해 여론을 통제했습니다. 이처럼 105인 사건은 단순한 폭력 진압이 아닌, 철저하게 계산된 식민 통치 전략의 일환으로 기획된 국가적 공작 사건이었습니다.
3. 105인 사건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교훈
105인 사건은 조선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일제의 정치 조작 사건**이며, 한국인들이 경험한 **지식인 탄압의 본격화, 독립운동 말살 정책의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탄압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민족운동의 조직화와 국제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 민족운동의 지하화와 해외 확산 105인 사건 이후 국내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조직 운동이 위축되었지만, 중국·러시아·미국 등 해외로 망명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지하화, 국제화가 가속화됩니다. 이는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만주 독립군 결성,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확산으로 이어집니다. ● 한국인들의 민족자각 고양 비록 일제가 사건을 조작했지만, 국민은 이 사건을 통해 일제 통치의 본질을 직시하게 되었고, 민족 간 연대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기독교계, 교육계, 언론계의 자정 노력과 비판 의식도 이때 본격적으로 강화되며, 이후 3.1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마련됩니다. ● 현대적 교훈 105인 사건은 공권력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통제되었을 때 발생하는 폐해, 그리고 시민 감시와 비판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단순한 ‘항거’만이 아닌, 조직력, 문화력, 국제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105인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깊은 상처이지만, 그 안에는 항거와 지혜, 절망과 연대, 저항과 희망이 교차하는 역사적 진실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침묵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잊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탄압의 기록은, 오늘 우리가 자유를 지킬 책임의 출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