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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과 박정희의 등장, 혼란 속에 탄생한 군사 정권의 시작
동글나라 2025. 5. 7. 23:00목차
1961년 5.16 군사정변은 민주주의의 시도였던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군부 권력이 정치를 장악한 사건이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서막이었고, 한국 현대사에서 군사주의와 경제 개발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1. 제2공화국의 혼란과 군부의 불만
1960년 4.19 혁명은 이승만 독재 정권을 끝장낸 국민 주도의 민주혁명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제2공화국은 내각 책임제 형태의 민주 정부로서, 자유와 민주주의, 법치주의에 기반한 정치체제를 새롭게 출범시켰다.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이 체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의회 중심의 정치를 실현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출범 초기부터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행정력의 부재,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정권 내부에서는 국무총리 중심의 내각제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었고, 국회는 각 정파 간의 분열로 효율적인 정책 추진이 어려운 상태였다. 국민은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기대감과 동시에 경제 회복과 사회 안정에 대한 요구가 높았지만, 정부는 이러한 민심을 수습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반응하였다. 경제 상황 또한 악화일로였다. 인플레이션과 실업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토지 개혁 이후 중산층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사회 불만은 누적되었다. 농민과 도시 서민 모두 정부의 무능에 실망하고 있었으며, 학생층과 노동계에서도 점차 반정부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큰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 계층이 바로 군이었다. 군 내부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군인의 위상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장교단 중 일부는 전쟁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았음에도, 정치와 행정의 영역에서는 배제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력의 재정비와 병영 생활 개선도 지지부진했으며, 국방 예산의 부족은 군의 사기 저하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 장교들은 ‘국가를 구하겠다’는 명분 아래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이들은 정권의 무능과 부패, 안보 불안을 이유로 내세우며 군의 개입을 정당화했고, 마침내 1961년 5월 16일 새벽, 계엄령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는 군사정변을 감행한다. 5.16 군사정변은 한국 민주주의의 첫 의회 중심 정부였던 제2공화국을 단 1년 만에 붕괴시켰고, 이후 18년 동안 지속될 군사 정권의 서막을 열었다.
2. 5.16 군사정변의 전개와 군사정부 수립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며 정권 장악에 나섰다. 서울시내 주요 통신망, 방송국, 국회, 청와대 등을 신속하게 점거하며, 장면 내각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였다. 국무총리 장면은 정변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잠적하였고, 대통령 윤보선은 군부의 실력 행사 앞에 무력했다.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행동을 **‘혁명’**이라고 선언하며, ‘부패한 정치권을 일소하고 국가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여 입법, 사법, 행정 등 국가의 모든 권한을 장악하였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임명된 박정희는 사실상 새로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정변 직후, 군사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당과 언론의 활동을 제한하였으며, 정치인들을 대거 구속하였다. 부정축재자 처벌, 사회 기강 확립, 산업 재건 등의 목표를 내세우며 개혁을 추진하였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경제 정책과 인사 쇄신도 단행하였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군 출신 경제관료들과 미국의 협력을 통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을 준비하게 된다. 박정희는 1962년 3월, 군정 종료 후 민간 정부로의 이양을 약속하며, 다음 해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그해 8월, 군복을 벗고 정치에 입문하였으며, 민정 이양 선언 이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 당시 박정희는 강력한 경제 재건 의지와 반공 노선을 내세워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었고, 야당 후보 윤보선과의 접전 끝에 1963년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하지만 박정희의 정권 장악 방식은 민주주의 원칙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는다.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력으로 해산시키고, 헌정 질서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쿠데타 이후 군정이 민정으로 이양되긴 했지만, 그 실질적 권력은 박정희와 군부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후 그는 장기 집권의 길을 걷게 된다. 5.16 군사정변은 이처럼 단기간 내 정권 교체를 이룬 사건이었지만, 그 과정은 헌법을 무력화시키고 민주주의 절차를 중단시킨 비합법적 권력 찬탈이라는 점에서, 이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3. 군사정변의 역사적 평가와 민주주의의 과제
5.16 군사정변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민주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한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군사 쿠데타’라는 비판과 동시에 ‘근대화의 기점’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정변 직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부는 빠르게 국가 통제 체제를 정비하였고, 사회질서의 재정립과 경제개발 계획 수립을 통해 일정 부분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후 18년간 이어졌고, 한국 사회의 근대화, 산업화, 수출 중심 경제 구조 확립이라는 경제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정치적 측면에서는 언론 통제, 정치 탄압, 유신헌법 제정 등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며 민주주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유와 인권은 희생되었고, 국민의 정치적 참여는 제한되었으며, 야당과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 일상화되었다. 특히 5.16 정변은 이후 여러 차례의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는 선례가 되었다. 1972년 유신체제는 박정희 개인의 장기집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대표적인 정치 개악이었으며, 이러한 체제는 1980년 신군부의 5.17 쿠데타와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며 한국 정치사의 오랜 군사 통치 시기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5.16 군사정변은 단순한 정치권 교체가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큰 단절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낸 민주 정부가 무력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는 국민 주권과 헌정 질서의 무력화로 이어졌다. 민주주의는 절차와 제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해 가야 하는 체제이지만, 정변은 그 흐름을 역행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5.16 정변 이후 대한민국이 경제 성장과 사회 기반을 일정 부분 정비하며 현대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양면적’ 평가가 계속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위주의 통치 속에서 산업화를 이룬 한국은 민주주의의 완성과 경제적 자립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추구해야 했다. 결국 5.16 군사정변은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국가 발전에 대한 논쟁의 출발점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한 찬반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그 속에서 어떤 가치를 놓쳤고, 무엇을 얻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절차가 왜 중요한지, 국민 주권의 원칙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 한 번의 선거나 혁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지켜내고 회복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며, 5.16 군사정변은 그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해준 비극의 이정표였다.